[림버스 컴퍼니] 修羅의 道
etc군밤2023-05-11 09:08

⚠️ 텍스트 고어(유혈, 부상, 칼로 찌르거나 베는 행위의 상세 묘사)





1.

세상 모든 것은 흐름을 따라 유동한다. 필연은 언제나 물의 급류처럼 작용하며, 인과에는 맥락이 있다. 오티스는 그 굵은 줄기가 삼라만상을 관통하며 지배하는 이치임을 확신해 왔다. 그리고 거기에 휩쓸리는 타인들과 다르게, 물살에 몸을 맡기고 흘러갔다. 때로는, 아니,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순리에 저항하는 대신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상책이었으므로.




2.

검계를 구성하는 이들은 모두 생존을 위해 검을 쥐었다. 그리고 삶의 이유는 인간의 머릿수만큼이나 무수해 개중에는 배곯지 않는 삶을 외치는 자도 있었고, 저항이야말로 삶을 증명하는 길이라 믿는 이도 있었다. 그저 시취와 혈향을 통해서만 생을 감각하는, 타인을 죽이는 행위야말로 자신의 삶을 증명한다고 믿고 검을 뽑으면 피바다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 같은 야차도 물론 존재했다.

시작은 생존을 위한 연대였으나 무리가 불어나면서 검계의 성질도 상이해졌다. 무武만을 숭상하며 칼부림에 취해 사는 금수 같은 삶으로는, 더한 것들이 판치는 이 도시에서 오래 맥을 이을 수도 없었다. 누군가는 달라야 했다. 이상이 추대한 이는 오티스였다.

이상이나 싱클레어처럼 살수—조직 내 추앙되는 이—들이 혈, 살기 따위의 도취로 적을 동강 내는 것과 다르게, 오티스만은 끝까지 침착한 판단으로 칼자루를 휘둘렀다. 그가 먼 과거 스승을 죽였을 때부터 그러했다. 오티스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었고 스승은 이에 상충했다. 오티스는 제자로서의 도리보다 삼라의 이치에 충실하기로 했다. 바윗돌 하나에 폭포수가 흐르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것처럼. 다만 스승을 넘겠다는 혈기, 자신과 반하는 이에게 불똥처럼 튀는 적대나 충동과는 달랐다. 오티스는 인내했다. 스승을 베어야겠다는 판단을 내릴 때까지, 명분이 손안에서 벼려질 때까지. 스승의 작태를 감내했다. 오랜 시간 자신과 타인을 마모시켜 가며 견뎌냈다. 그리하여 분별로 스승을 벨 합리를 재단했고, 당위를 찾은 직후 망설임을 버렸다. 스승을 허리를 베는 것은 망설이는 것보다도 간단했다. 스승의 가르침을 새기며 감내한 시간이, 인과의 물살이, 벼려온 도륙이 칼날의 예리함을 가중했으므로.

오티스는 언제나 현실적인 판단을 놓지 않는다. 수라장 속 사투에서도 그는 적이 파훼 못 할 가장 날카로운 무기, 명분을 찾아왔다. 피비린내 나는 야만과 붉게 손을 더럽히는 죄를 감내할 정당성이야말로 그의 검이었고.

오티스는 검계 중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쥐는 자였다.




3.

달빛에 흰 검광이 심야를 찢어 가른다.

반 바퀴 호를 그려 회전한 칼날이 옆구리를 횡으로 베어낸다. 날에 들러붙는 핏물과 살점은 원심의 가속으로 떨쳐낸 채로, 한껏 당겨온 검에 온 호흡과 체중을 실어 꽂는다. 날 끝에 늑골이 걸리는 감각에 손잡이를 비틀었다. 악력 실린 손짓에, 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컥, 차오른 피를 토해내며 쓰러진다. 조금의 지체도 없이, 마치 흐르는 물살에 타 춤을 추듯 연이어 숨통을 끊어나가는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유려하며 무참한 몸짓에는 살기가 묻어나지 않았다. 오티스는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그 안광을 이지로 차갑게 빛냈다. 그건 살인하는 자의 낯 치고는 지나치게 정연하며 평온하다. 자신이 하는 행위에 도덕적 의문을 품지 않는 자의 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눈.

싱클레어는 문득, 그게 한없이 두려웠다. 그가 살의도 충동도 품지 않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섬뜩했기 때문이다. 살육에 무감하거나 희열을 느끼는 것은 도덕적 죄가 아닌가. 검을 휘두르는 일에 인도적인 견지를 나란히 세우는 건 검계 가운데 어린 싱클레어뿐이었다—불행하게도—.

마지막 치를 궁지에 몰아넣은 오티스가 싱클레어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날을 겨눠 제압한 상대는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낯을 힘없이 늘어트린 채였다. 죽음을 예감하고 체념한 것이다. 목덜미를 물어뜯기 더없이 좋은 기회다. 오티스가 알려주지 않아도 싱클레어는 직감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자신을 향한 혐오가 한 박자 늦게 차오른다. 저도 모르게 검을 쥔 반대 손을 말아쥔다.

"베어라."

"제가, 말인가요……."

"그래."

오티스는 간단한 설명이라도 하듯이 읊었다.

"이 자는 부패한 집단의 앞잡이로, 몸담은 조직의 각종 약탈, 살인, 강도에 동참했다. 비열한 작자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겠지. 이 자는 네가 베라는 이상의 전언이다."

싱클레어의 낯이 창백해졌다. 검을 쥔 손을 강직시키다가, 무언가 울컥 범람하려는 것을 억누르듯 입술을 짓씹는다. 아마도 검계와 그가 지닌 윤리적 결함의 무게를 재고 있을 것이다. 사실 어느 면에서는 검계도 이치와 다를 바는 없었으므로. 싱클레어는 총명했고 아마도 지각했을 테다. 오티스는 잠시 그를 연민했다.

이상은 대개 싱클레어 같은 아이에게 야멸찼고 피를 보면 광증을 앓듯이 무참해졌다. 더군다나 싱클레어가 저와 같은 살수임을 안 뒤로는 그 폭거가 더욱 심해졌다. 이전에는 주저하는 싱클레어의 손에 손을 겹치더니 역수로 적의 목을 썰어냈다. 찔러 죽이는 효용 대신, 무지막지한 힘으로 길게 그어 '베는' 감각을 아이에게 새겨넣었다. 살점이 갈라지며 나는 축축한 소리와 물컹한 단면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던 싱클레어는, 경악에 한동안 검 자루만 봐도 헛구역을 했다.

오티스는 한숨을 쉬었으나 이상은, "그것이야말로 아해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오."라고 말했다. 각자도생을 외치는 그 치고는 퍽 마음을 쓰는 태도였으나, 본디 삿된 야차나 진배없는 그의 관심이란 유약한 싱클레어에게는 역으로 독이었다.

"칼을 갈아내다 부러트리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지."

"그대는 흐름을 긍정하는 것으로 아오."

이상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역류하는 치를 베어낼 때, 외려 꺾일 것을 겁냈소?"

"애먼 과거는 들추지 말고 할 말만 해."

"아해는 부딪쳐야 하오. 충돌이 반복되면 피막과 껍질이 깨진다는 것도 깨달아야 하오. 그래야만 스스로 허물을 깨고 날아오를 수 있으니."

그의 설명에 오티스도 답에 귀결했다. 이상은 싱클레어를 격류에 밀어 넣으려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가공하겠다는 오만에 가까운 안배. 아이를 양육하는 것보다는 짐승을 길들인다는 쪽이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과연 당신다운 야만이군. 오티스는 감상을 찻물에 섞어 제 목구멍 안에 흘려보냈다. 그가 아무리 달빛과 웃음을 경계한들 그 삶의 피비린내는 몇 겹의 옷과 그늘로도 감출 수 없다.

사람의 본성 또한 물의 흐름과 같은 법이다. 물길을 틀거나 막아둘 수는 있어도, 없는 데서 샘솟거나 거슬러 오를 수는 없었다. 이상이 하는 짓은 나는 새의 날개를 꺾거나 뭍에 사는 치의 폐부를 도려내 아가미로 만드는 폭거였다.

싱클레어더러 여기서 베어내게 하는 것은 흐름을 막는 일이다.

"물러나도 상관없다."

적의 목 언저리에 흰빛이 호로 맺혔다. 잠시 후 피가 터져 나오며 그의 머리통은 바닥을 뒹군다. 오티스는 싱클레어 대신 살육한 검을 털어낸다. 낙수한 혈로 낭자한 피 웅덩이 가운데를 구르는 몸이, 머리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바람이 체온과 함께 그의 목숨을 갈취할 것이다.

"돌아가지."

휘두른 칼자루를 갈무리해 넣었다. 날에 맺힌 서늘한 빛이 검집 사이로 까무룩 삼켜진다. 몸을 돌려 나서면서, 오티스는 자신의 판단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의 판단은 합리적이었으나 묘하게 미지근한 감각이 걸린다. 무해한 온도가 열상처럼 손바닥 안에 오래도록 남는다. 형용할 언어를 찾을 지표가 된 건 뒤따른 싱클레어의 말이다.

"……배, 배려해 주신 거죠. 감사합니다."

오티스는 잠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답답했기에 나섰을 뿐인데. 헛웃음 치려던 숨소리가 잠시 멎는다. 오티스는 제 안에 묻어둔 것을 발견했다. 피비린내가 멀어진 탓인가.

"착각하지 마라. 이상에게는 똑바로 보고할 테니."

짐짓 겁을 주듯 말했지만, 오티스는 자신이 겨누어진 착각을 품었다. 아이가 들이민 것은 날이 아니라 망설임이라 일컬어지는 인간성이었고. 배려, 라는 단어가 피 대신 바짓단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오래전 적출했다고 생각한 자리에는 아직 뜨거운 피 도는 심장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중이다. 누군가를 죽인 이후에 자신의 인간됨을 실감한다니, 대가가 큰 깨달음이건만 기껍지만도 않았다. 삼켜둔 실소를 이제야 터트린다. 아이는 조롱이라 여겼는지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싱클레어는 오티스의 뒤를 종종 따랐다. 달그림자 둘이 길게 늘어진다.

이윽고 그것은 겹쳐 하나처럼 보이게 되었다.




4.

이상은 싱클레어를 검처럼 대했다. 그 자신의 삶 또한 무딘 것을 벼려왔던 탓이다. 이상은 싱클레어의 유약을 갈아내 연마하고자 했다. 아해는 그에 의해 제련되고 있었다. 오티스를 비롯한 몇몇인가는 그런 저를 가리켜 혹독하다고 힐난했으나 이상은 남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위인은 아녔다. 그러면서도 자기 확신만은 완고한 성정의 치였고.

싱클레어가 목표를 베지 못했다는 이야길 전해 들은 낯은 표표하다. 달빛 맺힌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다만 입에서만은 못마땅한 듯 앓는 소리가 흘렀다. 오티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상은 이따금, 그리고 지금도 싱클레어를 과거의 저와 겹쳐보고 있었다. 다만 이상은 그보다 조금 일찍 닳아졌고, 그 때 이른 마모야말로 지금의 자신을 조형했다고 확신했다. 누구도 일러주지 않아 홀로 방황과 흉터로 자연히 익힌 것을 다만 싱클레어에게는 친히 일러주겠다고 이 짓을 자행하는 것이다. 오티스는 직언을 주저하지 않는다.

"녀석은 당신의 유사품이 아니야."

허를 찌르는 정론이었다. 싱클레어는 이상의 과거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미련을 희석할 수단이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오티스는 단호하게 이상의 착각을 걷어낸다. 이상은 선선하게 수긍하지 않았으나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소리 없이 침묵을 지킨다. 자신으로 침잠하는 모양이지. 반추를 통한 자기비판만은 예리한 남자였으므로, 오티스는 구태여 정적을 깨지 않았다. 고요가 이어졌다.

조금 뒤에야, 문에서부터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싱클레어의 윤곽임을 짚어낸 이상이 입을 열었다. "드시오." 움찔한 싱클레어가 조심스럽게 장지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티스는 그와 교체하듯이 마루로 나섰다. 쓸데없이 입을 놀리지 말라는 듯 마지막까지 이상을 흘기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부르셨다고 들어서……."

"앉으시오."

끄덕인 채로 주변을 돌아보던 싱클레어는 벽과 문에 가까운 쪽에 붙어 앉았다. 둘만 남자 꾸물거리는 눈치였다. 차를 호록 마시던 이상이 먼저 입을 연다.

"마무리를 주저하였다 들었소."

"……."

"어째서인지 묻고 싶소만."

잔을 내리는 이상을 바라보다가, 싱클레어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상이 묻는 말에 돌려줄 답은 온전히 맺음 지은 답이 아니다. 도리어 자신의 의문이었다. 육신에 칼날을 꽂을 때 팔을 타고 전해지는 울림, 비산하는 혈과 피비린내에 선뜩이는 정신, 자각하는 순간 경련하며 내려오는 입꼬리의 희열. 그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공포, 불안. 싱클레어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얕은 호흡이 흘렀다. 떨군 시선이 바닥에 놓아둔 검집에 닿았다. 칼자루 끝에 늘어진 붉은 매듭에 머문다. 선혈을 떠올린 듯 주춤했다. 떨리는 목소리가 났다.

"사람을 죽여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법도에 얽매이기를 거부한 치들이오."

"꼭 그것만은 아니에요. 저 자신이 옳은 건지 의문스러워서……."

싱클레어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상은 눈을 깜박이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하면, 무엇이?"

"누군가의 목숨을 너무 쉽게 베어 내버리는 건 아닌지…… 이렇게 희열을 느끼는 건 미치광이일 뿐인 게 아닌가 싶어서, 계속 의심하곤 해요."

싱클레어가 발화하는 삶, 윤리적 토대에 자신을 견주어 정의를 따지는 삶. 이상은 그러한 삶을 버린 지 오래였다. 도시의 뒷골목에서 혈혈단신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의심하기보다 확신해야 했으므로. 칼날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겨누어 쥐어야 하는 법이었다. 검을 쥐고 사는 자들이니 그 삶도 검과 같아야 마땅했다. 한데 싱클레어는 검을 역수로 쥔 것과 같았다. 어느 방향으로나 무참하여 힘을 실을 수 있으나 자신마저 상처를 낼 손이다. 살수가 지니기에는 거추장스러운 사고다.

"나나 오티스는 상대는 의심할지언정 자신을 의심하는 법은 잊었소. 타인을 죽이기 위해서는 하등 무용한 행위이기 때문이오."

이상에게 제 부덕을 재단할 기운은 사치나 낭비나 다름없다. 사실 검계로 사는 많은 이들이 그러했다. 사회에 반하는 것은 사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며, 일견 자유로운 것은 질서가 그들을 품은 적 없던 탓이다. 적용된 적 없는 집단의 기준에 나를 맞추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어디에 있던가.

"그렇군요. 역시…… 망설임을 버려야만 하는 걸까요."

싱클레어는 제 앞을 먼저 걷는 이들을 우러러볼 줄 알았다. 그렇기에, 그들이 말하는 가르침을 쉽사리 따르지는 못해도 귀를 기울였다. 검계에 몸을 담고, 검을 쥔 때부터 스스로 다짐한 것이다. 그들처럼 날카로운 검이 될 것이라고. 소년은 제 가슴 한편에 피와 함께 도는 결의를 되새긴다. 불가항력을 거스를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세를 고쳤다. 허리가 곧게 선다.

이상은 싱클레어의 시선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칼자루에서 검집으로 미끄러지는 소년의 눈길을 쫓는다. 무릇 사람은 도리가 있으며 그 궤는 오티스가 으레 말하는 '흐름'으로 주조된다. 방금 소년은 붙박았던 몸을 다시 그 길에 내던진 듯했다. 이상은 제가 잡아넣으려던, 그러나 텅 비어버린 틀을 조망한다. 소년이 날아간 채 유년으로 남은 자리를 감각한다. 차라리 다행인가.

하나 그들의 길은 수라의 길이다.

"사람을 베는 검이 되겠다면 무딘 곳은 벼리는 것이 옳겠소. 망설임은 비단 둔함만이 아니오. 반하여 자신을 찌르는 양날에 가까우니."

그렇게 말한 남자는 잔을 들어 남은 차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망설임을 베어낸다는 것은 물러설 자리를 스스로 가라앉히는 행위나 진배없다. 위태롭고 치열한 삶이 될 것이다. 생존의 폭력과 야만만이 팽배할 테니. 차라리 떠민 이를 탓할 수야 있다면 숨통이 트이리라 생각했건만. 이상은 자신이 떠밀기 전에 먼저 발을 뗀 싱클레어를 힐긋 곁눈질하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해의 곧 바래질 순수만은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 반짝임만은 달빛보다도 오래도록 들여다볼 마음이 들었기에.

숨과 함께 내쉰 말이 나지막했다.

"하지만 살아가는 데엔 제법 쓸만할지도 모르겠구료. 자신마저 예리하게 갈아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꿰뚫을 수도 있을 줄 아오."

방황의 마침표이자 또 다른 시작에 건네는 찬사다.




5.

오티스는 찬 밤바람에 몸을 식히며 달을 본다. 등 뒤로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싱클레어가 보였다. 그 낯은 달빛과 그림자가 맺히듯이 후련함과 두려움이 혼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희박해 보였다. 기민한 오티스는 싱클레어가 비로소 흐름을 찾은 것을 깨닫는다.

"이상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싱클레어가 멋쩍게 웃었다. 고개를 젓는 낯은 티 없이 깨끗하다. 여전히 살의보다 주저를 상상하기가 쉬운 얼굴이다.

"이제 자러 갈 텐가?"

"아뇨. 달을 조금 보려고요. 왠지 생각이 깊어져서……."

"마음이 복잡하다면 달빛을 올려다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오티스 씨도 그런가요? 저도 그래요. 혼자서 달을 보고 있으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져요."

"반가운 말이군. 이상 같은 치들이나 달빛을 꺼리지. 그들은 달빛에 제 수치가 드러날까 안달하는 이들이니."

약간의 비아냥을 담은 농에 싱클레어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농 탓인지 싱클레어는 퍽 자연스럽게 오티스의 옆에 와서 섰다. 그림자가 나란히 늘어진다. 두 사람은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이상 씨나 오티스 씨처럼 되려면, 망설임도 없어야겠죠?"

문득 싱클레어가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티스는 이상과의 대화가 큰 답은 되지 못했나 보군, 생각하며 대꾸할 머리를 굴렸다. 오티스 또한 언제나 판단에 지체가 부재하지는 않았다. 여지를 남겨두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 또한 무결한 승리의 덕목이었다. 그러나 싸움은 언제나 수만이 아닌 시간을 고려해야 했고, 이끄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물러설 수 없을 때 신속하며 대담해야 함을 뜻했다. 그것은 주저 대신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너는 목표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지?"

"……."

"우리들은 살아남는 것, 나아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 자신을 어디까지 내려놓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오티스의 물음에, 싱클레어가 잠시 침묵했다. 오티스는 옆얼굴에 맺혔던 시선이 떨어진 것을 느낀다. 한참 뒤에야, 아이는 이제는 꺼낼 수 있는 자신의 의문을 뜯어내 내민다. 끈끈하게 들러붙은 것의 해리가 한결 쉬운 것은, 아마도 이상과의 대화 덕분이리라.

"사실, 끊임없이 되묻곤 했어요. 누군가의 목숨을 그렇게 쉽게 베어내도 괜찮은 건지, 사람을 베어낼 때 희열을 느끼는 게 맞는 건지……."

아이가 조곤조곤 발화하는 음소에서 오티스는 묘하게 따끔한 자학의 감각을 찾는다. 도덕적 흠결을 묻는 판단은 오래전 놓아버렸는데도. 오티스는 이따금 검계 조직원 몇몇이 쓰게 웃으며 하던 말을 떠올렸다. 가끔 싱클레어가 우리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해요. 그러나 소년은 낮의 천진보다 혼탁한 밤하늘 아래서 말했다.

"하지만, 당장 답을 낼 용기는 아직 없지만…… 여러분처럼 날카로운 검이 되고 싶어요. 방황하는 만큼, 더 베어내서라도……. 그러니까 저도 망설임을 베어낼게요."

그는 결국 살수였다. 오티스는 무심코 긍정해 버렸다. 유쾌해서였다. 아이는 저들이 연민한 만큼 역약하지 않았다.

"그래. 너 자신의 마음을 베게 되더라도 망설이지 마라."

오티스는 그 건체를 베어내는 것이야말로 적의 목을 써는 것보다 어려운 일임을 안다. 그는 한때 스승의 몸으로 수육한 망설임을 제 의지로 잘라내는 일에서 반죽음을 겪었으므로, 허리를 동강 내기를 주저한 찰나에 스승이 남긴 상흔을 지금까지 몸 어딘가에 간직한 채 살아왔으므로. 그러나,

이상이 흉터를 낸 치들을 베어냈고 오티스가 스승을 베어낸 것처럼 싱클레어는 망설임을 베어낼 것이다. 해묵은 죽음을 새로 흘린 피로 덮으며, 켜켜이 쌓은 시체의 탑을 산처럼 뒤로하고 걸어갈 것이다. 혈로 낭자한 발자국이 죄의 증명으로 낙인처럼 찍힐 것이다. 생이 멎을 때까지 살해와 싸움을 멈추지 않으니 죽음 끝에도 안식이 없으리라. 검을 손에서 떼려야 뗄 수도 없이 휘두르다 자멸하는 업보를 받을 것이다.

오티스는 차마 잘한 생각이라 긍정할 수 없었다. 평가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의 삶을 일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만큼 섣부른 방종과 만용도 없기에. 단지 오티스가 얹을 수 있는 말은, —그조차 이상에게 경고했던 데의 모순으로—제 삶에서 얻은 아쉬움뿐이었다. 자신을 베어내서라도 망설이지 말 것.

찬란한 인간성을 내려놓더라도 추악하게나마 생존할 것.

"아침부터 칼을 휘두를 거라면, 이만 들어가라." 그 말을 남기고 오티스는 몸을 돌렸다.




6.

그들은 정도正道를 알았다. 알면서도 삿된 도에 몸을 던졌다. 비틀린 흐름에 몸을 내맡기고 핏물 속을 흘러갔다. 천벌이 예정됨은 자명했다. 어린 싱클레어에게는 잔혹하게도. 이상과 오티스는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그들은 얌전히 개죽음을 택하느니 차라리 죽어서까지 칼을 휘두르는 수라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오티스는 뒤로한 소년이 둘의 등을 따를 것임을 안다. 피에 날뛰는 야차, 살해를 주저 않는 냉혈한을 넘어서 살수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는 소년을 그렸다. 죽음을 손에 쥐고 휘두르며, 끝없는 싸움 안에서 살아낼 불쌍한 영혼. 그것이 아이가 태고부터 지니고 난 물길이었다. 어쩌면 그 물살을 저와 이상이 가로막는 날이 오면 저들 또한 허리를 내어주게 될지도 모르지. 그때가 오면 아이의 성장으로 기뻐할지 인과의 업보로 통탄할지 아직은 알지 못하는 채로,

오티스는 가만히 웃었다. 입안에 쓴맛이 번졌다. 혈향 같았다.




7.

그들은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고 그러므로 순리에 따라 흘러간다.

살아낸 길 끝에, 흘린 피로 깊은 지옥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