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버스 컴퍼니] 시계視界, 始系
etc군밤2023-05-11 09:10

⚠️ 텍스트 고어(유혈, 부상의 상세 묘사)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자기 자신을 잃는 사람은 (그로써 자기 자신을) 얻을 것이다.』
——— 마태복음 16장 25절



휑하니 빈 안와로 핏물이 차올랐다. 파우스트는 자신이 무표정인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안면 근육이 짓는 표정 따위에 주의를 기울이기에는 섬유 다발이 끊겨 나간 자리가 하염없이 아팠다. 눈꺼풀의 여닫힘을 인지할 눈 한쪽이 사라진 채로, 파우스트는 눈을 깜박이는 법을 되짚어야 했다. 어둠을 덧입은 오른쪽 시야가 막막했다. 파르르 떨리는 날숨이 흩어졌다. 시야가 도려내졌다는 실감조차 어딘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파우스트는 휘청, 기울어질 뻔한 무게 중심을 가누며 주변을 더듬는다. 피와 섬광의 색으로 새빨간 검을 더듬어 쥔다. 그것을 지렛대 삼듯이 땅에 꽂고 몸을 일으켰다. 접질린 발목과 등허리의 타박상은 감각 저편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푹 꺼진 오른쪽 눈의 빈자리가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의료적 처치를 취해야겠지만 시신경을 복구하는 시술은 사치였고, 단지 안와를 채우는 보정용이라 해도 둥지도 아닌 뒷골목에서 구하기는 어려웠다. 당분간은 적당히 가리고 다니는 것으로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치료받지 못하는 채로 시간이 지나면, 안쪽 살이 차오르더라도 한참 부족한 채로 텅 빈 골격이 함몰될 것이다. 비정형의 안면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회사 바닥을 굴러다니던 동료의 으깨진 얼굴이 겹친다. 미약한 구역감이 올라오는 통에 파우스트는 어깨를 잘게 떨었다. 생리적 역겨움보다는 어떠한 실감에 가까웠다.

앞으로 오른쪽 시야는 영영 사각이 될 것이다.

아직도 얼굴을 흐르는 피가 땅으로 뚝, 뚝, 떨어져 내린다. 떨군 왼눈이 멍하니 더러워진 바닥을 담았다. 그건 반만 가린 스크린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시야가 밀려난 것 같기도 했고. 파우스트는 연신 눈을 깜박였다. 그게 마치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내는 행위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가시영역의 부피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상실의 감각이란 어찌 이리도 비좁은 것일까.

비합리로 토막 난 불완전의 세상만이 파우스트의 전부였다.




날끼리 부딪치는 금속음이 예리했다. 파우스트는 이상의 검을 흘려넘기며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큰 반경으로 원을 그리며 찔러 드는 검날은 수비가 까다로웠다. 더군다나 찌르기는 사거리가 길었고, 베어내기 위해 거리를 좁히기에 이상은 빈틈이 없는 상대였다. 합을 주고받으면서 파우스트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땅을 밀어내듯 박차고 도약했다. 무표정한 낯이 순식간에 훅 원근을 좁혔다. 눈앞으로 가까워진 이상이,

"예측했소."

그어지는 칼을 기민하게 걷어냈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신속한 동작이었다. 동시에 단순한 반사신경이라기에는 정밀했고. 그의 말대로 공격을 읽혔던 것이겠지. 속으로 판단을 내리며 파우스트는 고쳐 디딘 발의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회전한다. 다시 큰 반원을 그리며 베어내는 공격. 칼날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른다.

휘두른 참격을 흘리면서, 이상은 몸을 낮춰 파우스트의 우측을 파고들었다. 순간 내찔러진 검날의 반사광이, 파우스트의 시야각에 맺히지 않는다. 대응할 수 없는 무방비한 사각지대. 파우스트는 남은 반사신경을 최대한 끌어올려 왼발로 땅을 짓친다. 날 끝에 관통당할 것이다—

"—"

이상의 검은 어처구니없이 오른팔에 막혔다. 남자가 주로 쓰는 기술은 예리하게 찔러 드는 관통이었고, 조금 전 형편없이 허공을 그어 내린 공격은……. 그러나 사각에 위치할 검날을 팔등으로 가늠하면서, 파우스트는 아찔함을 느낀다. 그가 적이었다면. 만약의 가정으로 가역되지 않는 부상을 재차 실감한다. 입안이 썼다. 가시가 돋치는 기분이다. 공포는 형태와 방향을 바꾸어 날숨에 내뱉어진다.

"힘이 덜 실렸네요."

레이피어를 뿌리치며 파우스트는 다시 반격으로 칼자루를 올려 치듯 휘둘렀다.

"방심한 것은 아니오."

파우스트는 이상이 내찌른 검 끝에 힘이 빠졌음을, 멈칫하던 주저를 읽었다. 이상은 인제껏 파우스트의 외눈을 신체적 특징으로 인지해 왔으나, 방금 한순간만큼은 전투에 불리한 요소로 해석했을 것이다. 신체적 불완전성. 진중한 그로서는 나름의 사려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당신에게 고마워하지 않아요.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죠."

말을 내뱉고 한 박자 뒤에, 파우스트 자신의 민감함을 깨닫는다. 어쩌면 적을 비인간화하는 무자비나, 집요하게 노리는 가학성보다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파우스트가 생존을 위해 검을 쥔, 필사적일 수밖에 없던 사람만 아니었다면.

파우스트는 이상과 다르다. 이상은 여유를 가졌고, 그가 말하는 예측과 탐구라는 단어에는 빈곤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탐색해 봐야겠소.' 언젠가 이상의 낭패감 서린 말을 들으며 파우스트는 그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꼈다. 언표하자면 질투에 가까운 성질이었다. '다시'라는 말이 허락되는 사람을 향한 질시. 그런 남자가 보내는 불완전한 이해는 파우스트의 신경을 예리하게 긁었다. 파우스트는 시혜적인 연민, 이해를 가장한 동정이 부르는 다단하고 미묘한 모멸감을 안다. 느낀다. 토막 난 반쪽짜리 세상의 공백이 선명해지는 때의, 실낱같은 존엄조차 부식되는 착각을.

방금 이상이 보인 망설임은 파우스트의 신체 조건과 전투 능력을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는 격하에 가까웠다.

"실전이었다면 이럴 일은 없었겠죠. 사정을 봐준 게 죽음으로 돌아왔을 테니까요."

덤덤한 말씨와 달리 파우스트의 검은 꽤 매섭게 쇄도했다. 휘어짐 없는 검이 공기를 찢으며 달려든다. 이상은 쓰게 번지려는 웃음을 날숨에 흩어냈다. 파우스트를 자극한 제 무례를 깨닫기란 어렵지 않다. "그대의 말대로요." 불필요한 연민이란 전투에서는 만용이었다. 당장 파우스트의 공격이 더욱 사납고 정교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생각보다 호전적이라고 여겨야 할지, 내려치는 동작이 거침없음에 이상은 문득 파우스트가 살아있다고 느꼈다. 팔과 허리를 노리는 참격 하나하나에서 잠재한 파우스트란 인간의 감정을 읽는다.

존중이란 상대를 자신과 나란하게 보는 것. 상대를 이해하는 탐구의 귀결이 되는 것. 한 가지 요소에 얽매여 관심을 편향하는 것은 외려 불가지의 반증이다. 남자는 온당한 이해를 위해 검을 고쳐 쥔다.

"탐구는 끝났소. 최선으로 임하지."

그 말마따나, 검을 쳐낸 이상은 숨을 들이쉬더니, 대번에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퍼부어왔다. 주저가 사라진 공격은 정확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온다. 이제까지의 공방으로 파우스트에 대한 탐구가 모두 끝났다는 듯이. 칼날이 노리는 것은 명료했고 담백하게까지 느껴졌다. 파우스트에게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신체에 국한된 과도한 인식이 거두어지는 것. 그런 시선은 무능감을 일깨울 뿐이다. 몰아치는 공격 속에서 도리어 숨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치열하게 합을 겨루던 두 사람은 잠시 거리를 벌리고 숨을 고른다. 먼저 달려든 건 이상 쪽이었다. 이번에도 망설일까. 파우스트는 잠시 멈추어 서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챙!

뒤늦게 끌어온 검으로 막아봤자 헛수고였다. 이상의 칼날이 파우스트의 칼을 강하게 쳐냈다. 검이 손안에서 빠져나가며 빈손이 된 파우스트는 연신 몰아치는 공격을 피하려다 결국 등에 바닥을 대고 쓰러졌다. 목 옆으로 날을 겨눈 이상이 중얼거렸다. "끝났군." 선고처럼 떨어진 말에, 파우스트는 힘을 뺀 채로 몸을 늘어트렸다. 이번에는 살기 위해 맨몸으로라도 발버둥 칠 이유가 없었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널브러진 채 멍하니 숨을 고르는 파우스트에게, 이상이 손을 내밀어왔다.

"그대의 소질과 기량은 뛰어나오…… 검술을 교육받아 본 적은 없소?"

"필요한 기술은 익혔어요. 본격적인 교습을 말하는 거라면, 그럴 여유는 없었어요."

파우스트는 외로 된 시선을 드물도록 올곧게 맞췄다. 그러나 초점은 남자의 손을 비켜가 밤하늘을 향해 있었다. 도시 뒷골목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드물었다. 이렇게나 낮은 고도에 머물다가는 짓밟히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시체와 피, 늘어진 전선과 더러운 바닥에서 어디 있을지 모를 적의 발자국을 찾아야 했던 기억들. 그가 지닌 주위를 관찰하는 버릇은 호기심보다는 강제된 생존의 방식이었다. 종잇장을 넘기던 손이 어울리지 않는 검을 쥐고 굳은살과 피 냄새를 덧쓴 것처럼. 이상과 같은 반추는 사치이고 지식의 탐구조차 이제는 그러했다. 상실을 대체할 것도 없이 남은 몸뚱이로 살아남아야 했다. 사는 방법을 새로 익혀야만 했다. 숨을 쉬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처럼.

파우스트는 일어나지 않은 채로 이상을 올려다봤다. 입술이 달싹였다.

"파우스트는 싸우기 위해 검을 든 게 아니니까요. 살기 위해 휘둘렀을 뿐이죠."

누군가는 눈썹을 늘어트리거나, 위로를 건넬 말이었다. 이상은 별다른 기색 없이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가 이해한 파우스트라면, 연민이야말로 걸어온 삶에 대한 모욕이 될 터였다. 다만 이상은 그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파우스트가 불가항력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누군가는 그 손에 돌려주어야 했다.

"그대에게 기본기를 지도하고 싶소. 다른 것은 나무랄 데가 없으니, 그것만 익힌다면 자신의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손을 내민 채로, 그러나 억지로 파우스트를 끌어 일으키지는 않았다. 원치 않는 친절을 강요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시선을 옮겨, 그늘진 이상의 얼굴을 심도 있게 주시했다. 어떤 유해함이 있는지 읽어내려는 것처럼. 그러면서 한숨처럼 말했다.

"저는 당신이 보살펴야 할 사람이 아니에요."

이상은 별 지체를 두지도 않고 즉답했다.

"정전이 된 좁은 방에 홀로 59일을 있어 봤으니 그러하겠다고 생각하오."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지도 않아요."

"미련에 맹목하지 않는 것은 지혜롭구료."

"오른 눈이 파우스트의 우수함을 가린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동의하오."

파우스트는 문득 이 문답이 피곤하다고 느껴졌다. 이상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해 봤자 그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밖에 더 될까. 생존을 위해 뒷골목을 전전하면서, 파우스트는 특유의 통찰안으로 그 세계가 돌아가는 방법을 파악했다. 그조차 이해를 위한 노력이었으나 파우스트는 이제 차갑게 자조할 수 있었다. 현실의 세상은 부조리와 비합리를 이치로 돌아갔고 그것은 한낱 지성과 논리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 당장 정체 모를 괴물이 지하에서 돌아다니는 도시이니 무리도 아니었다. 세계가 이렇게나 불가해로 가득한데, 맞은편에서 식사하던 동료를 살리기보다 그 시체를 처분할 뿐이던 내가, 당신과. 다시 숨을 터트렸다. 여자는 무표정했으나 거진 헛웃음이나 진배없다.

"세상에는…… 이해를 포기해야 하는 존재들도 있어요."

체념 같은 말이었다. 그러자 이상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시선의 고도차가 한층 줄어든다. 사람과 사람 간의 간극이 좁아진다.

"태양광선 속에는 무수한 스펙트럼이 있소. 인간이 가시광선 외의 것을 찾아내듯이, 사람에 대한 내 탐구도 마찬가지요."

그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다. 그 접촉의 행위가 무슨 가치를 띤다고 이러는 것일까.

"……."

물끄러미 바라보던 파우스트는 그제야 천천히 팔을 들었다. 경직 끝에 긴장이 풀렸는지, 당겨지는 팔 근육이 아우성치는 기분이었다. 삐걱거리는 팔을 뻗어 이상의 손을 맞잡는다. 남자는 단단히 손을 받치고는, 파우스트를 이끌어 올렸다. 몸을 일으키고도 그 시선의 고도는 조금 더 고개를 들어야 맞았다. 방금까지는 그렇게나 나란했는데. 우리는 이렇게 고저의 오차값이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이상은 무던하게, 그러나 단단히 잡은 손을 붙잡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감싸 쥐는 행위가 그들의 상호연관성을 증명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고맙소, 파우스트 양."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이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 맺힌 검은 머리칼이 살랑 나부꼈다.

파우스트의 외로 편향된 시야에도 이상의 얼굴은 어둠에 잘리는 일 없이 전부 담겼다. 문득 왼편으로 기운 남자의 위치를 깨닫는다. 아마도 그의 안배였다. 파우스트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푸른 눈은 달빛을 받아 이채를 띤다. 마주 본 이상은 여전히 무표정한 낯이었다. 웃음도, 슬픔도, 몰이해도, 긍휼도,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는 고요함이 파우스트는 어쩐지 기꺼웠다.

오른쪽 눈의 막막함이 희미해진다. 비로소 시야와 견지가 일치하는 감각.

세상 안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그의 옆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