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N. 레온하르트] 믿음
DX3rd군밤2022-03-19 16:17

어느 날을 기점으로 남자는 가라앉은 블랙톤 대신 밝고 부드러운 색채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흰 머리칼에 피부 아래로는 그림자라도 두른 듯 새카맣던 올블랙 수트가 한순간 명도가 확 오르더니, 흰 폴라티나 연한 정장을 골라 입는 것이다. 적당히 포멀한 스타일은 여전했다만, 심경에 무슨 변화라도 있었는지 표정까지 한결 유해진 것이 이변이라면 이변이었다. 그다지 이유를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데릭의 바랜 한쪽 눈은 종종 로자 바스커빌을 향해 흘끗 시선을 던졌다. 유대나 친밀감이라기보다 추종이자 숭배에 가까운 온화한 눈짓이었다.

그 변화는 데릭에게 꼭, 해묵은 육신을 버리고 거듭남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 먼지와 땀, 죄와 불안과 병증 따위의 불온한 것들을 물로 씻어내듯이, 그 강물에 수장해 죽이고 새로이 태어난 것처럼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야 돌아보는 것이라지만, 여태의 삶에서 몸에 둘러온 가죽, 그 아래의 굴곡을 짜는 섬유와 골수, 근간을 이루는 아주 오만하고 무가치한 정신까지……. 합리와 지성으로 말미암은 주관이라 믿었던 것들은 실로 얼마나 나암하기 짝이 없으며 가당찮은 허영이었는가? 데릭은 입술을 말아 실소할 따름이다. 아마 그의 환상적인 파트너가 아니었다면 깨달았다 한들 그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로자 바스커빌은 손짓 하나 않고도 데릭의 눈꺼풀을 열어 저 너머의 앞을 비춘다. 장밋빛 립글로스를 바른 입술로 그의 가치가 온전히 발할 수 있는 어떤 삶의 방식을 속삭였다. 누군가는 제안이라 부를 그것을 데릭은 계시라고 여겼다.

"요즘 입는 그 정장, 어울리는군요. 데릭."

디멘션 게이트를 통과해 집무실에 들어설 때는 정확히 6시 59분이었다. 데릭, 하고. 마지막으로 이름을 부르던 로자의 목소리가 집무실 벽에 부딪혀 울린다. 그리고 시곗바늘이 정각을 향해 옮겨가면 로자는 대수롭잖게 시선을 거두고 서류에 집중한다. 활자를 훑어내리는 시선은 몇 분 후 '그림펜'에게 전달할 내용을 짚어, 머릿속으로 일목요연히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노상 그랬듯이 한없이 의연한 풍경이고 일과였다. 그런데도 서류를 매만지는 투명한 손톱 끝이, 의례처럼 건넨 인사말이 형용하기 힘든 이유로 그를 희열하게 하는 것은 왜인가. 상사의 이름을 부르며 대꾸할 수는 없으니 데릭은 픽 웃고만 말았다. 로자는 보기에는 들은 척도 않은 듯 펜을 쥐고 서명을 이어갔다. 데릭은 안경테 모서리에 설핏 걸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바람 빠지듯 숨소릴 냈을 때, 그 날렵한 눈꺼풀이 간지러운 모양으로 허물어졌다 고쳐 뜨이는 것을 두 눈에 똑똑히 담았다. 남자는 즐거운 기색으로 입술을 말아 올리고, '네임 오브 로즈'의 지시를 기다릴 뿐이다.

사실, 어쩌면 로자 바스커빌은 오히려 이 한없이 깊어지기만 하는 마음을 경멸할지 몰랐다. 이성이 부식되어 눈먼 자처럼 그녀의 앞에 엎드려지는 이 감정을 맹신이라 불러 짓씹어 조소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반문이 가능한 지점이 있다. 과연 이 맹목 같은 믿음에는 선험 되는 이성이 없었는가? 정녕 충분한 사유와 검열이 없었단 말인가? 데릭 레온하르트는 한 치의 거짓 없이 당당히 부정할 수 있다. 분명한 성찰의 결론이었노라고. 데릭이 그것을 한 번의 호흡 안에도 빠듯하게 수를 쪼개어 나눌 순간순간마다 사고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따져 묻기를 반복하며 명제는 확고해져만 갔다. 데릭의 능력은 로자를 보좌하기에 부족이 없다. 세상에 홀로 존재할 것처럼 차게 식은 남자의 온도는 사실 누군가에 의해 언제고 불붙여지기 위한 긴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로자 바스커빌은 그를 이용하는 데에 주저가 없다. 데릭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수족으로 기능할 때 얼마나 큰 효율을 쥐여주는지 셈은 물론이요, 직접 거두어 부린 경험이 있던 것이다. 그래서 텅 빈 팔에 제 팔을 감아 어느 달 6일을 내어주고, 남자가 원하는 찰나의 답을 쥐여주는 것으로 그녀가 오래도록 필요로 할 것을 취했다. 그만한 계산과 책략에 능한 철저하고 영악한 여자를. 그러고도 하염없이 긴 시간을 함께해 말라붙은 감정마저 층을 이뤄 쌓이게 하는 여자를. 어떻게 믿지 않을 수가 있겠냐는, 하여 그만큼 진실로는 그녀를 믿고 싶다는, 갈망에 가까운 확신. 여타의 감정이 그러하든 믿음이 깊어지며 그 형질이 바뀌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데릭 레온하르트의 확신은 신앙과의 근사치를 넘어서 완전한 동일성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