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즈리하 소라] 기울기 시작한 것들
DX3rd군밤2022-03-19 16:22

처음으로 놀러 온 타츠키의 집.

소라는 타츠키가 타준 코코아를 마신다. 카페에서 마시던 것보다 달고, 잘게 조각난 마시멜로도 들어 있어 입맛에 딱 맞다. 뱃속을 데우고 몸을 녹이는 음료를 홀짝이고 있으면 조금 전까지 자책에 휩싸여 펑펑 울음을 쏟아내던 것이 꿈처럼만 느껴진다. 현실이란 자각을 붙들어둘 수 있는 건 그런 자신을 감싸던 양팔의 온도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처럼 따뜻했던 덕이다. 유즈리하 소라를 이 현실에 붙들어둔 당사자는 환한 낯으로 기다란 상자를 엎은 채로 직육면체 나무토막을 빼내고 있다. 세 도막씩 교차해 가지런히 쌓아 올린 기둥을 보고 있으면 타츠키가 다정한 웃음과 함께 물어온다.

"소라쨩, 젠가 해본 적 없지?"

소라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홈에서 생활하던 시절부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취미는 없었다. 소라의 신드롬은 모르페우스였고, 충동은 파괴였다. 구태여 찾을 필요 없이 손끝에서 모래로 만들어낸 덩어리를 보면, 레니게이드는 그것을 지었으니 파괴도 너의 몫이라며 충동질하기 바빴다. 침식률이 불안정해지자 교관은 두 가지를 지시했다. 하나, 운용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훈련 이외의 이펙트 사용을 자제할 것. 다른 하나, 모사품을 만드는 훈련을 하겠다면 교관의 지도 아래, 장난감이 아닌 실전 장비로 복제하는 훈련을 할 것. 그 시절의 소라는 할 줄 아는 것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따르는 일뿐이었다. 칠드런 '인트론'에게는 플라스틱 모형과 철제 탄창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정도의 미세함에 불과했다. 결국 원자를 뒤섞어 재조립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형질과 구조의 차이는 원자의 조형이라는 명료한 대전제 아래서 한없이 가벼워지는 개념이었다. 그렇다면 숭고한 의의와 인도적 차원에서의 검열의 구분이 퇴색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얼마 후 탄창을 모사하던 중, '인트론'의 훈련 보고를 받은 키리타니 유고의 지시로 그 교육은 일단락되었다. 아직 어린 칠드런을 대상으로 실시하기에는 성급한 것은 차치하고, 기본적인 윤리도 무시하는 비인도적인 훈련이라는 지적이었다. 젊은 일본 지부장은 '우리는 수호자를 훈련시키는 것이지 병기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높여 성토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자면 퍽 우스운 모순이 아닐 수 없겠으나 당시의 모두는 그 말에 감복하거나 수긍했다. 해서 지도는 무산되었고 해당 교관에게는 경위서와 자숙 조처가 내려졌다. 그 이후로 칠드런 '인트론'에게는 최소한의 훈련만 내려졌다. 홈에 틀어박혀 몸 안에 버젓이 흐르는 레니게이드를 잠자코 죽이며 살았다. 결국에는 장난감도, 무기도 쥐지 못해 애꿎은 도감이나 펼쳐놓고 눈을 굴리는 신세였다. 그 덕분에 누군가의 이름은 지어줄 수 있었지만.

이런저런 기억이 타츠키의 손길에 켜켜이 탑을 쌓은 나무토막처럼 치솟는다. 그런 무력하기 짝이 없는 새장 속의 삶이라도 좋다고 여겼다. 새장이 구속 같이 느껴진다면 그때에야 스스로 자유를 구가하면 된다. 새장이 가혹하고 비좁다면 부피를 넓히고 아늑하게 고치면 되는 일이 아닌가. 유즈리하 소라는 그 새장의 벽이 제게 있어 비호였다고, 진심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를 떠나는 것은 상상조차 너무도 먼 전제였다. 아득한 두려움이 언젠가부터 발목을 옥죄고 몸을 기어올랐다. 소라는 유독 물질에 부식되어가던 묘지와 자신의 방관을 떠올린다. 아직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것들. 언젠가 멀지 않은 날 UGN은 이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궤멸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기묘한 공백을, 전 UGN 일리걸이었던 FH 머서너리를. 그리고 맞춰진 퍼즐 사이로 드러난 빈자리—한 칠드런의 윤곽을. 그 용의자가 저란 사실이 명징해지는 날 유즈리하 소라의 새장은 반파된다. 구속보다도 끔찍한 방류가 들이닥칠 것이다. 물질이 아닌 것은 모르페우스의 능력으로도 재구성할 수 없다. 대체할 수 없는 불안과 고독으로 텅 빈 몸을 꾸역꾸역 채우고 감내로 걸음을 뗄 것이다. 향하는 정처 없는 비통한 방황이 이어질 것이고 소라는 그에게 약속한 길로 끝내 향하지 못할 것이다……. 타츠키가 겨우 달래준 눈물이 다시 차오를 것 같았다.

그 사이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으므로, 소라는 덜 식은 머그잔을 들고 기우뚱거리는 젠가 기둥을 내려다본다. 바깥쪽을 빼면 균형이 기울어질 테니 적당히 아랫부분의 가운데 토막을 빼면 차례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 순서를 넘겨봤자 의미가 있을까? 사실은 이 평온은 전부…… 결국에는 무너질 것들의 유한한 유예가 아닐까? 손을 뻗는 대신 벌린 입술 사이로, 초콜릿의 단맛으로도 지우지 못한 불안이 샌다. 혀 아래 가두려 애쓰던 것을 기어코 젠가 한 토막 대신 빼내는 것이다. 한없이 무구한 웃음 앞에서는 고해라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탓쨩은 어떨 것 같아요?"


EG
소라가 걸어온 길을 알 수 있는 최고의 연성... 추천합니다... RPD 직후 시점인 걸까요... 어쩐지 고록 느낌의 대사로 글이 끝나는데 답로그도 있다면 읽어보고 싶네요... 잘 읽고 갑니다...
03.25 15:05 답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