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이 아카리] 조각들
DX3rd군밤2022-03-19 21:37

히라이 아카리는 죽음에 익숙한 여자였다. 여타 감식관들이 그렇듯이 그는 향수보다 시취에 무뎠고, 쨍한 볕이나 루즈의 붉은 빛보다 창백한 조명등, 혈흔이 검게 바랜 색을 낯익게 여겼다. 여자는 현장 도처에 산개한 죽음의 흔적을 되짚는 동안, 제 몸을 흐르는 피와 맥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인물이었다.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부단할 뿐 받아들이는 것은 하등 어려울 것 없는.

(이어지지 않음)

여자는 미스즈에게 충실하려 했고, 자신의 과오를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다시 떠나지 않으리라고도 믿지 못했다. 그러지 않았다.
미스즈는 언제든지 히라이 아카리의 곁을 다시 떠나갈 수 있다. 이 명제는 미스즈의 가능성인 동시에 아카리의 가정이었다. 인형의 호화롭고 파괴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미스즈의 권리였고. 아카리가 자신을 완전히 죽이기 위해 남겨둔 죄목이었다. 그날, 방을 부식시키면서도 제 몸만큼은 건사하려 수없이 리저렉트를 반복했을 자신을. 죽은(그렇게 믿었던) 미스즈를 따라갈 의지도 없이 생존의 본능으로 눈 떠 연명하는 육신을. 자살이라 이름 붙여둔 이 우스꽝스러운 오버드를 멸하려는 자기혐오에, 이유를 붙여주기 위해 남겨놓은 명분.

(이어지지 않음)

여자는 빈곤한 무신론자였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상이나 인간애를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었으므로. 자신을 죽이는 일이 곧 세계를 죽이는 일과 같았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여자를 구제하지 못하는 신은 여자 자신이었다.

(이어지지 않음)

여자는 가끔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다. 장례식의 문상객은 몇이 될지 가늠하거나, 몇 없는 재산이 얼마나 미스즈의 몫으로 돌아갈지 따위를 머릿속으로 가만히 상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만 펜을 들어 종이에 유서를 적었다. 내용은 세부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대개 동일했다. 미스즈를 잘 챙겨주세요, 그 아이는 당신을 잘 따르니까요, 당신이 유일한 책임자잖아요, 같은 반강요의 부탁이 줄줄이 이어졌고 그 편지를 받을 이도 언제나 한결같았다. 히라이케 소우. 아마도 미스즈를 한 번 더 일상으로 되돌릴 수 있을 유일한 사람. 그 아이의 장송곡을 연주할 자격에 가장 모자람 없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