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내방자'란 '버스게이트'라는 기계를 통해 이 세계에 불러진, 다중우주에 산재한 오버드들의 가능성이라고 했다. 원인을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으나 소환된 그들은 예외 없이 강력한 오버드였고, 이 사회의 정부는 그들의 내방을 막을 수 없으므로 빌런에의 포섭을 막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소라는 내방한 이들 중 '운 좋게' 그들의 눈에 들어 제도적 지원을 받은 내방자였다. 달리 말하자면 등록의 절차를 밟아가며 사회에서 비-적성 인자로 녹아들기 위한 단계를 거치는 중이었다.
히어로 '줄라이 원 파이브'와 '아스트라피'—하나비와 타츠키는 그런 소라를 포섭하러 온 인물들이었다. 정확히는, 포섭하지 못하면 처분할 권한까지 쥔 이들이기도 했다. 하나비는 실제로 자신을 적성 존재로 견지했던 편이었고. 그러나 그들은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사상과 논리로 난해한 타인을 수용하려 애썼다. 어른이 아이에게 다정해지려는 것처럼, 생인에게 예의를 지키려는 것처럼. 혹은,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연민하는 것처럼.
소라는 그 시도를, 그러기 위해 마련된 여력—정신적 혹은 환경적 여유를 부럽다고 생각했다. 질투했다. 제게는 선택의 기회와 자의가 거세된 삶뿐이었으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어 다만 편리한 수단을 쥐어줄 이의 편에 의탁할 뿐이었으니까. 살아남기에 급급해 결여로 얄팍한 일생이었으니까. 그 열등감 탓으로 그들과 적으로 마주 보고 부딪히기까지 했다. 다만,
결과적으로 소라는 자신이 질투하고 선망하던 그들의 여유에 구원받았다. 그건 다른 말로 존중, 혹은 이해, 혹은…… 다정함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깨달았다. 자신은 절대 가지지 못할 것 같았지만, 어쩌면 앞으로는 가까워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 또한. 그의 삶을 손수 설계해 온 '플래너'로부터 해리된 지금에서야.
"그렇구나. 그곳에서는 '플래너'가……."
"즉, 네가 온 곳은 빌런들이 히어로의 위치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네. 전복적인데?"
고저가 다른 두 음성이 각각 감상을 발화한다.
내방자는 사회적응을 위한 멘토-멘티 지원 제도가 존재한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하나비와 타츠키 두 사람은 소라의 전담 멘토가 되었다. 소라는 그들과 히어로 전용 카페에서 한가하게 음료를 쪽쪽 빨며 '면담' 중이었다. 자신이 있던 세계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들 간에 존재하는 정보의 오차, 인식의 괴리를 천천히 감축해 가는 것이다.
물론, 존재가 공표되지 않은 내방자에게는 그 자체로 고독과 향수를 해소할 기회이자,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관계로 작용하기도 했다. 눈앞에서 생각에 잠긴 소년이나 턱을 짚은 하나비가 아니었다면, 소라는 로이스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이 세계에 내던져진 채 고독하고 비루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채 다만 무명의 '빌런'으로 취급되었을지도 모르고.
"소라 씨, 레모네이드 좋아해요?"
생각을 치고 들어오는 살가운 음성. 말갛게 웃는 낯으로 타츠키가 물어온다. 소라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하나비가 픽 웃었다.
"입에 맞았나 보네. 한 잔 더 마실래?"
아. 입에 문 빨대로 하릴없이 음료를 빨아대자니 어느새 컵이 빈 모양이다. 달그락, 남은 얼음들만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소리가 났다. 황급히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왜, 넌 한창 자랄 때니까 더 마셔도 돼. 그러고 보니 밥은 제대로 챙기고 있는 거지?"
"하하, 하나비 씨 말처럼 식사는 중요하니까. 제도 지원으로 혼자 지내고 있었죠?"
타츠키까지 거들자 소라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워낙 표현의 강도가 희박했던지라, 하나비가 예의 집요한 시선으로 낯을 들여다보아도 그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보호자와의 동거를 한사코 거절하고 단신으로 자취를 선택한 아이였다. 육신마저 무기이자 자원으로 소모하는 데 익숙해 보이던 소라가 홀로 제 몸을 건사할 수 있을지 의심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내방자는 주거 지원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실장 키리타니를 위시한 대책실에서는 소라를 위해 아파트 원룸을 마련해주었다. 조금 더 쾌적한 환경을 선택할 기회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결정은 소라가 했다. FH의 열악한 시설이나 마음 놓고 눈 붙일 수 없던 기억에 비교하면, 단 한 평이라도 경계를 내려놓고 방심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은 충분히 황송했다. 물리적 간격이 좁은 쪽이 외려 인기척을 가늠하기 안전하게 느껴졌고. 식비나 생활비도 기초적인 수준은 지원됐는데, 얼마든지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했다. 소라는 타츠키나 린이 먹곤 하는 간식거리를 배울 때마다 '집'에 오는 길에 한 아름 사 왔다. 질릴 때까지 단맛을 씹고 씹었다. 그렇게나 먹는데도, 다들 말리기는커녕 밥 챙기라느니 좀 먹으라느니 만나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얹는 건 FH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참견이었다. ……귀찮아. 소라는 대충 끄덕이며 넘겼지만 뭘 모르는 말이었다. 팔뚝살은 조금 붙었다.
"그나저나 라이선스를 취득한다면, 히어로 네임도 역시 '아조트'로?"
하나비가 제 몫의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소라는 이번에는 바로 고갯짓이나 대꾸하는 대신 빨대를 만졌다. 플라스틱 안쪽으로 맺힌 물방울이 흐른다.
"……아직, 모르겠어요."
"급할 필요 없어. 그냥 물어본 거니까. 앞으로 천천히 생각하면 돼."
"맞아, 중요한 거니까 신중히 정하는 것도 좋겠죠. 충분히 고민해 봐요."
"응……."
고개를 끄덕인 소라는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시간이 돼서……. 가볼게요……."
"그 인간 만나는 거지? 같이 가는 게 아니라 뭘 해줄 수가 없네. 무리한 부탁 시키면 적당히 거절해, 소라쨩."
하나비는 조금 질린다는 낯으로 고개를 저었고, 타츠키는 그 모습에 아하하,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허물없는 듯 느슨한 모습이 문득 새삼스럽게 편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분위기 속에 자신이 녹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는 감상도. 이채로 눈을 몇 번인가 깜박이던 소라는 꾸벅, 인사한 뒤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카페를 나섰다.
내각부 레니게이드 관련 대책실 입구를 통과한 소라는 실장실로 안내된다. 몇 번 드나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라를 부른 장본인이 눈을 맞추고 웃었다. 한낮의 볕을 블라인드 틈 사이 배경으로 두고, 집무용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온화한 인상의 남성.
"어서 오십시오, 소라 양."
소라는 고갤 주억거리며 주변을 돌아본다. 후지사키는 보이지 않는다. 시선을 알아차린 키리타니가 엷은 미소를 유지한 채 자리를 권한다.
"오늘은 후지사키 씨는 안 계십니다. 편하게 자리에 앉아주시길."
마련된 의자를 끌고 몸을 기대자 키리타니도 책상에서 일어나 응접용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는 따뜻한 톤의 벽지와 눈이 편안한 식물 화분이 몇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 안정을 심어주기 위한 연출들. 이 세계는 그러한 신뢰로 돌아가고 지탱되는 세계였다. 사람의 믿음. 가장 깊고 굳건한 듯 실로 얄팍한 비정형의 암묵적 합의. 눈앞의 남자는 그것을 제일의 가치로 믿고 의심치 않아야만 하는 입지의 사람이었고.
"면회 요청을 주셨더군요. 마침 저도 드릴 말씀이 있던 차에 기회가 닿았습니다. 가벼운 이야기부터 시작하죠."
키리타니는 경박하지도, 그러나 부담스럽지도 않은 무게의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소라는 네, 짧게 대답했다. 첫 만남에 비하면 확실히 조심스러운 태도였기에 키리타니는 그의 변화에 무심코 웃지 않으려 표정을 다듬었다. 남자는 재킷 안쪽에서 안경집을 꺼낸다. 본인이 사용하는 것일까.
곽을 두 손으로 쥔 키리타니가 짐짓 가볍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위로 놓였다. 무기가 될 수 없기에 신경에서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미리 올려둔 서류가 몇 장 있었다. 소라는 시선을 옮겨 타이핑된 활자와 사진을 훑는다. 저와 똑같은 이름, 똑같은 얼굴.
"아시겠지만, 이곳에는 소라 양과 동일한 인물이 앞서 존재합니다, 만…… 그분께서는 활동 중인 히어로 후보생으로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기도 합니다."
여상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기에 순간 그렇구나, 맞장구를 칠 뻔했다. 그러나 키리타니가 한 손으로 안경집을 소라 쪽으로 밀 때에는 그의 의중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안경은 소라를 위한 것이었다. 소라는 건넨 것을 받아 열어본다. 붉은 아세테이트가 굵직한 뿔테 안경이다. 안경알이 형광등 조명을 매끈하게 반사했다.
안경을 들여다보는 소라를 확인한 키리타니는 자신이 쓴 안경을 벗어 보여주며 담백하게 말했다.
"저 또한 시력이 나쁘지는 않지만, 안경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소라 양의 것과 마찬가지로 도수가 없죠."
말하는 남자의 눈매는 생각보다 또렷했고, 눈동자는 부드러운 듯 힘 있는 빛을 띠고 있었다. 소라는 그에게서 처음 묘한 활기를 느꼈다. 정확하게는 그의 눈이 내뿜는 올곧은 빛에 압도될 것 같았다.
키리타니는 다시 안경을 썼다. 한 번 굴절을 거친 눈빛은 적당한 신뢰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느껴지지 않는다. 꼭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을 그로부터 보호하는 무장 같다.
"의외로 이런 도구가 인상의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내더군요."
확실히 인상을 흐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생각하며 소라는 안경과 키리타니를 번갈아 보았다. 키리타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이펙트로 바꾸는 것 정도는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그는 소라가 든 안경을 일별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어울릴 것 같아서 직접 골라왔거든요. 천연덕스러운 말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도 같았다. 소라는 도리질하고는 안경집을 닫아 조심스럽게 제 카디건 주머니에 넣었다. 키리타니는 어쩐지 흐뭇한 기색이었다. 손이 빈 소라가 다시 키리타니를 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낯이 한층 진중해졌다.
"그리고 '서펜트'의 면회 요청 말입니다만,"
본론이다.
소라는 가능한 한 주기적으로 서펜트의 면회를 요청해 왔다. 당연하지만 후지사키는 즉답으로 거절했고, 우호적인 키리타니도 그것만큼은 곤란한 듯 검토가 필요하겠다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소라는 다음이 되면 거절 받은 기억이 리셋이라도 된 것처럼 끈질기게 면회를 요청했다. 몇 번인가의 집요한 요구 끝에 키리타니 쪽에서 후지사키를 뺀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소라가 예측하건대 후지사키도 이 자리에서 오갈 정보는 알고 있을 듯싶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위험도가 높은 인물입니다. 가벼운 대화조차도 그가 상대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만큼. 물론, 저 역시 한때는 포섭 대상으로 고려했습니다만…… 그건 결론적으로 제 실책이었지요."
소라는 고개 대신 눈동자를 끄덕이듯이 느리게 감았다 떴다.
키리타니가 물었다.
"소라 양, 그와 대화하려는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물음이었으나 실상 신문이었다. 답은 평가될 것이며 그에 따라 거절과 승인으로 나뉠 터다. 소라에게 기울여질 주의와 감시를 더 강화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사회로 포섭되지 못할 양상을 보이는 내방자. 서펜트의 가해와 책임. 실제 일어난 피해 사실, 구축되는 중인 사회의 안전망을 흐릴 수도 있는 요주의 인물.
"……서펜트, 죽고 싶어 했어요……."
소라는 아까 전 들여다본 안경의, 유리알에 맺혔던 제 모습을 떠올린다. 곡률 있는 표면에는 소라의 모습만이 부풀어 맺혔다. 주변의 다른 풍경은 모두 아득해지는 채로. 너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외따로이 해리된 존재라는 듯이…….
그건 서펜트도 마찬가지일 테다. 내방자 중 적잖은 이들 또한 그럴 터였다. 소라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그들을 연민했다. 자신도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동질감에서 기원했다. 소라가 만일 린과 함께 눈을 뜨지 않았다면, 하나비와 타츠키를 만나지 못했다면, 혹은 그들이 바로 소라를 처분했다면. 가능성의 갈래는 무수했고 그 분기 하나하나는 절박이 빚은 무한가능성의 작은 확률을 끌어다 온 기적이다. 두 번째 서펜트가 되는 미래는 단 한 끗 차이로 소라를 비껴갔다. 아니, 이마저도 완벽한 난외는 아니다. 소라는 언제든지 졈이 될 수 있다. 오버드는 모두 졈으로 분화할 가능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내방자도 언제든지 두 번째, 세 번째 서펜트가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서펜트는 선례 중 하나였고, 소라는 그걸 입안이 쓴 결말로 남겨두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야트막한 숨으로 뱉어내는 말은 꼭 흐느낌 같았다. 그렇게나 무덤덤한 어조로도.
"그 사람이 살았으면, 하고…… 말하고 싶을 뿐이에요……."
"……소라 양."
졈에 대한 감정적 측면의 접근은 분명 섣부른 면이 있다. 모든 졈이 안쓰러운 사연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과거나 내막이 저지른 가해를 정당화시키거나 실재하는 피해를 덮어 되돌릴 수도 없었다. 범죄자에게 부과되는 죗값이란 '지나치지' 않아야 할 뿐, 범죄의 심각성과는 비례하는 것이 마땅했다. 서펜트의 처분 권한은 하나비와 타츠키들에게 있었고, 그들은 불필요하거나 무자비한 고통을 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펜트 같은 죄과를 가진, 그리고 위험성 높으며 교정 가능성은 낮은 범죄자를 다룬다면 차라리 응보적 접근으로 처벌—'처분'되는 쪽이 합리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키리타니의 어르는 듯한 말씨에 어떠한 판단이 함축되었는지는 소라도 알 수 있었다. 알기 쉬웠다, 그가 그렇게 배려했으므로. 키리타니 유고는 그런 인간 같았다, 어느 세계에서든지.
"기억, 하고 있어요……. 졈화, 치료법이 개발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분명 이 세계에서도 졈화라는 현상은 존재했고, 그건 비가역과 불치의 영역에 걸쳐 있다. 하지만 소라가 있던 세계보다 전망은 훨씬 밝을지도 모른다. 키리타니는 소라가 말하는 바를 이해한다. 그는, 기록으로 남은 서펜트와의 전투 중 소라가 했다던 말을 떠올려 냈다. *그래도 당신은 키리타니 유고야. 그래도 누군가에겐 키리타니 유고였어. 당신을, 당신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
키리타니는 리더로서 서펜트의 비난에 반박하지 못했고, 그러나 실장으로서는 제압과 구금—혹은 처분—이 최선임을 인지했다. 같은 키리타니 유고로서는…… 이해하되 연민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 견지와 자조적 감상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용납한다면 자신의 과오에까지 관대해지고 말 것 같았으므로. 그걸 타인인 저 어린 오버드가, 그와 같은 이방인으로서 내미는 것을 마주하고 있자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실장 키리타니는 무심코,
"'내방자'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거의 순전한 무작위입니다. 하지만……"
온화한 미소를 내걸고 말했다.
"저는, 소라 양이 이 세계에 온 의미가 있다고 믿게 되는군요."
같은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의 말과 소름 끼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남성은 알까. 소라는 눈을 깜박이다가, 그대로 슬며시 허물어버렸다. 망막 안쪽으로 그의 말끔한 이마에 흉터가 덧그려진다. 내가 죽여야 했던 사람. 내가 살리고 싶어진 사람. 내가 이곳에 있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주는 사람.
"……그렇다면, 좋겠어요."
다시 눈을 뜨며 소라는 끄덕거렸다. 그들의 옆얼굴로 바깥의 태양광이 비쳐 든다. 조금 눈부신, 그리고 정갈한 풍경 속에서 키리타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으로 나가면 면회 안내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면회 시간은……. 짧은 설명이 이어졌고 소라는 키리타니가 말한 것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말을 마치며 키리타니는 당부했다. 서펜트의 말을 너무 귀담아듣지는 마십시오. 그 말은 귀담아들어야 한다니, 소라는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안경을 쓴 남자와 서펜트의 낯은 그렇게 닮아있는데도.
대 오버드 격리시설의 벽은 새하얗다. 어떤 정신을 물들이는 오탁도 용납지 않겠다는 듯 결벽적인 색이다. 소라가 사위를 둘러보는 동안, 불려 나온 서펜트는 구속복이 입혀진 채로 유리 벽 맞은편에 앉는다. 서펜트는 철제 의자에 등을 기대는 대신 허리를 가지런히 세우고 앉아 소라를 바라봤다. 꼿꼿한 자세였고 고개와 시선 또한 그러했다. 왜 자신을 그때 죽이지 않고 이 가증스러운 곳에 가둬놓았느냐 묻는 듯이. 소라는 집요한 눈길이 목 언저리를 스친 것 같다고 느꼈다.
"……."
둘 중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고, 그 사이로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격벽 안쪽으로 서펜트의 입가에 맺힌 기체가 흩어지는 것이 보인다. 솔라리스 오버드의 레니게이드는 대기에도, 정신에도 간섭한다. 음성과 호흡을 매질로 타인을 주무른다니. 얼마나 무독한 듯 유해한 모순이란 말인가.
"동정하러 오셨습니까?"
상념은 얼마 가지 않아 끊겼다. 서펜트 쪽에서 먼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침묵을 깨는 것은 사회성 결여된 칠드런보다 희망으로 사람들을 이끌던 지도자 쪽이 더 능숙했으므로. 내용은 비아냥에 가까웠으나, 서펜트의 낯은 어떤 험악함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는 비소를 지을 때조차 단정한 인상이었다.
소라는 크게 소동하는 일 없이 그저 고요했다. 감정이 거세된 이처럼 미세한 균열도 없다. 서펜트의 정연한 얼굴빛과는 다른 의미로 정제된, 표백에 근접한 낯. 하지만 그 순간 왜소한 몸은 착각에 잠기고 있었다. 서펜트의 문장에 개복 되어 해체된 듯한 적나라한 폭로의 감각. 그건 소라가 자신의 세계에서 마주 본 '리바이어선'보다는 '플래너' 쪽을 연상시켰다. 앞의 남성은 어째서 키리타니 유고인데도 앞서 만난 실장보다 츠즈키 쿄카와 유사한 카리스마를 두른 것일까.
생각하면서도 소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밀랍처럼 무기질한 낯으로. 무심코였다.
물론 부정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러면…… 나빠?"
가치 판단을 유보하다 못해 떠넘기는 질문에 서펜트는 불쾌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실소했다. 값싼 동정은 그에게 모멸이나 진배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서펜트는 어떤 문장을 내는 일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리 벽 너머 아이가 되묻는 말에는 그게 이해라고 믿는 같잖은 착각이 없었다. 빌런을 바라보는 적대감도 없다. 서펜트는 아까 전 바라보던 소라의 머리카락, 그 끝이 머물던 길이를 곱씹으면서, 이전의 대치로부터 흐른 짧은 시간 동안 저 내방자가 사회에 물들지 못했다는 것을 파악했다. 오염되지 않았다, 아직. 그는 때 묻지 않은 것들에게 관대할 수밖에 없었다. 헛웃음을 부드러운 미소로 고쳐 짓는다.
"동정받는 상대의 감정이 상했다면 '나쁘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당신은 그렇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소라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펜트는, 마치 학생을 대하는 교사처럼 부드럽게 질문했다.
"왜 저를 동정하셨습니까?"
소라는 원래 세계에서도 우수한 칠드런이었다. 그건 곧 복종에 익숙하다는 뜻이었다. 불신처럼 사유와 주관이 필요한 마음은 그에게 희박했다. 망설임 없이 입술이 열린다. 대답을 출력해 내듯이.
"당신, '실장'을…… 혐오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그 사람처럼 거짓을 말하지 않으려던 거고……."
그들이 오랜 시간 교류해 온 사이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서펜트가 군데군데 내비친 키리타니 유고를 향한 환멸은 선명했다. 남자의 자기혐오는 결벽적일 만큼 해묵은 것이 느껴졌다. 후회 또한. 소라는 아담 카드몬을 언급하며 전장 한가운데에서 고개 숙여 오던 그의 모습을 기억했다. 저보다 헌칠한 키의 서펜트였으나 그때만큼은 속죄를 구하던 이가 왜소하게만 비쳐 보였다. 만약 그때 전장이었기에 예리해진 신경이 아니었다면, 소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거짓말한 건…… 변하지 않아. 당신은, 선해질 수도, 돌아갈 수도 없어서……"
그가 무력하게 지켜본 아담 카드몬의 실험체는 자신이 아니다. 그를 보속과 정죄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이 세계에 없었고, 서펜트는 그것을 알면서도 명분에 거짓을 섞었고 살인을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서펜트는 이 선택조차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후회하지 못할 것이다.
서펜트는 조금 이채롭다는 눈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칠드런은 병기다. 그에게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삶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자의와 자유가 주어진 자신과 박탈당한 아이가 어째서 근사치로 산출된다는 말인가.
"……똑같이 자라도, 나와 다른 생각을 한 칠드런, 분명 있어. 이용당하는 것에 저항하고, 탈주하고."
소라는 잠시, 그 세계에 두고 온 칠드런을 생각했다. 죽어 나가던 동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기억에 붙박은 뒷모습. 이름도 없는 괴물로 죽는 건 싫어.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뒤로 다시는 보지 못한 등. 지금은 원하던 이름을 가졌을까. 그건 어떤 발음일까. 물어볼 수도, 뒤따를 수도 없는 채로.
"나는,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선택할 거야……. 생각을 포기할 거야."
이제에 와서도 소라는 그때 그 작은 등을 붙들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그를 따라 나서서 새 삶을 찾은 자신보다, 그와 함께 뒤를 추적한 FH에게 '처분' 당하는 결말이야말로 훨씬 더 자명한 이치였다. 소라는 숨을 삼켰다. 갈비뼈 안쪽으로 차오르는 후회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후회할 자격이 없으므로.
"……살기 위해 외면하는 것, 죽더라도 마주 보는 것. 전자는 안위, 후자는 용기…… 어느 쪽이 이상적이겠어……?"
서펜트는 쓰게 웃었다. 말을 내뱉는 이는 명백하게 전자였다. 그러나 남자는 더는 이상을 입에 담지 않기로 결심한 부류였다. 후회할 자격을 스스로 박탈한 동류이기도 했고.
"그렇군요. 저항할 경우 헛되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니 영리한 판단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과연 '플래너'에게 선택받은 검이군요."
그가 절망한 세계는 아마도 아이가 속한 세계와 유사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교묘하게 입을 놀리자면,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무해해 보이는 발화로 그의 숨통을 찔러 들었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타인인 내 말은 선해해 주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구나……."
"……."
서펜트는 입을 다문다. 내쉰 호흡이 맺힌 자리마다 상이 일렁였으나 미소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만은 가장 견고한 가면이었다.
이번에 침묵을 깬 쪽은 소라였다. 당신은…… 어떤 세계에서 왔어. 평탄한 어조로 맺었기에 의문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혼잣말인가 싶었을 정도로 아스라한 발화였다. 서펜트는 그걸 들었다. 방금까지 필사적으로 가라앉힌 무언가를 들여다 확인하는 대신 묻어두면서, 짐짓 예사롭게 대꾸했다. 내용은 그러지 못했지만.
"이야기한다 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까?"
단발이 살랑, 도리질에 맞춰 흩날렸다. 그래도 듣고 싶어……. 무표정한 아이는 그러나 제법 완강했다.
"그렇게까지 듣고 싶으시다면 이야기해 드리죠."
한결 느슨하게 어깨를 내린 서펜트는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그가 기억하는 고향의 풍경과 삶은 여전히 선명했으나,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명료한 언어로 치환해 다듬는 것은 내방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울릴 만한 말을 고르는 감각이 낯설어져 있었다.
절망에 잠식된, 희망, 허무하게 짓밟힐. 입 밖으로 내뱉어 놓고 스스로 추상적인 어휘라고 생각했다. 그건 이제껏 내뱉지 못하고 덧칠한 감정들이 물크러져 혼탁하게 뒤섞인 표현이었다. 적확한 말로 내뱉으려 시도해 본 적이 전무했기 때문에, 전부 피상성을 띠고 막연할 뿐인. 그런 성질의 물길이 서펜트의 안에는 심해의 해구처럼 존재했다. 고인 채로 깊이 침전했다.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는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는 소라를 향해 내뱉었다.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린 소라는 그 이후로도 질문을 툭툭 던져왔다. 그곳의 사람들은 어땠는지, 그 세계에서도 당신은 '리바이어선'이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비록 추억담을 나눌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자세하고 장황한 이야기는 않았지만. 제게는 과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이름을 썼죠. 리더로서 동료들을 이끌었습니다. 간소화한 대꾸를 내어놓으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이펙트로 정신을 조종하지 않은 상대와의, 더군다나 이런 소탈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 했으나 나른함이 안개처럼 전신을 덮었다. 자각 못 했던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입안이 깔깔하다고 느꼈을 때, 남자는 자신이 감상적으로 되었음을 자각했다. 혈관에 약 몇 mg인가를 풀어 넣는다. 호르몬 따위야 간단히 제어하면 되는 일이다. 그는 이 행위를 더 이상 '속인다고' 여기지도 못했다.
적당히 간결한 답을 내어놓자, 소라는 만족한 것 같았다. 이따금 안광 희미한 눈을 깜박이더니 자신이 살던 세계의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절망만큼은 지독하게 닮아있는 세계였다.
문답으로 시간이 꽤 흘렀을 때, 잠깐 시계를 확인한—서펜트가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소라가 입을 달싹였다.
"이곳에 와서는 어땠어……?"
이번만큼은 끝맺음이 명료하지 않았다. "나는," 소라는 줄곧 서펜트에게 묻고 말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곳에 와서 혼란스러웠다. 세계와 그를 지탱하던 당연한 규칙들이 일변했으므로. 이전까지 자신을 구성하는 것은 말소되고, 낯모를 것들이 대체된다.
"나도, 이 세계의 '나'를……."
아니, 대체만 된다면 다행이었다. 그것들은 그저 들어차서, '떨어진' 소라의 자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R대책실에서 명명한 내방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다정했고 그래서 때로 기만적이다. 그것은 차라리 추방이다.
"보았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소라는 실장실에서 내려다봤던 서류를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히어로, 라고 했어……. 나와 똑같은 얼굴, 똑같은 힘을 다뤄……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우고……. 이름도, 같았어……. 나는 성은 없지만……."
"감상이 어땠습니까?"
"……이곳에는 내가 있을 자리가 없구나…… 하고, 생각했어."
"함께 내방한 '시그너스 레이'도 그런 생각을 하던가요?"
"……."
소라는 끄덕일 뻔한 고개를 순발력으로 경직시켰다. 부동은 꼿꼿했고, 침묵은 단호하다. 그래서 서펜트가 읽어내기 쉬웠다. 아마도 실장이 정보를 노출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나 보군. 칠드런은 잘 훈련된 정보원이었으나 그들을 훈련시킨 것은, 매뉴얼을 손보고 승인한 것은 결국 그였다. 서펜트는 악의는 없다는 듯 짐짓 피로하게 웃어 보였다.
"내방자는…… 이 세계에서 이방인입니다. 자신은 그저 존재할 뿐인데도, '누군가의 가능성', 즉 본인이 아닌 '타인'으로 밀려나지요."
인간은, 개인 낱낱이 결코 타인과 완전히 같지 않으며 그 유일함, 특별성을 근거로 생명의 가치와 생존의 권리를 주창해 왔다. 그렇다면, 거의 근사치를 가진 인물이 둘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단지 시간으로 구분되어 과거부터 이 세계에 존재한 이가 원본으로 명명되고, 미래에 존재'하게 된' 이가 내방자로 명명된다면? 자신의 정체성, 삶의 궤적과 방식, 움직이는 동기 모든 것이 동일한 인물이 이 세계에 이미 존재한다는 전제를 두고, 내방자는 '타인'으로서 내던져진 이 세계에서 기존의 어떤 고유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그들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생존하는 동안 자신의 존재 의의를 증명할 것이 강제된다. 동일한 '나'가 앞서 존재하는 이 사회로부터, 자아를 소거 당하지 않으려면. 내가 나로 존재하려면.
"말씀드렸죠. 이 세계의 주민들은 우리의 괴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서펜트가 허심탄회하게—연출해— 내뱉은 말에 소라는 숨을 내쉬었다. 상념이 뭉쳐 깊은 호흡. 도자기처럼 무기적이던 낯에 희미하게 감정이라 일컬을 빛이 번진다. 서펜트가 조금만 그럴듯한 말들을 속삭이면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라가 물었다. 기꺼운 질문이다.
"……당신은 어땠는지, 궁금해……."
"처음에는 일견 밝고 활기차 보이는 세계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만, 진실을 알게 되고 다시 한번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의 공감을 유도할까, 계산하면서도 서펜트는 기대를 품었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요구하고 바라는 이들에게 품은 죄의식으로 여기까지 전락하고서도 내심. 자신을 치는 데에 일말의 망설임 없을 것 같은 이 작은 칠드런과, 자기 혐오적 향수로 맹목하며 이 세계를 전복시키고 싶었다. 모든 것이 끝나면 소라나 제 죽음을 원하는 이들의 손에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처럼 쥐어 먹이겠다고. 남자는 그것이 계획일 뿐 희망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 냉동고에 처박혀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무고한 오버드가 희생되고 있겠죠. 내보내 주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능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소라는 물었다.
"이곳을 나가면, 당신은 세계를 바꾸려고 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기만을 밝히기 위해."
명분은 견고했으나 정당성이 없었다. 서펜트는 그 비난을 주창하기 위해 직접적인 폭력 행위를 흩뿌렸다. 이 세계를 상대로 가해자가 된 순간, 그는 타당할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 박탈했다. 소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당신한테, 못 맡긴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펜트는 흐릿한 낭패감을 잠시간 내비쳤다가, 지운다. 하지만 소라는 그를, 그가 내세우는 외침을 단절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게, 이 세계에 있는 동안은……. 그러니까, 쉬어도 돼……."
그가 낯선 땅에서 홀로 유리된 이방인으로 남지 않게, 비록 수단은 다르겠지만 목적만은 같이 할 것이다. 기만을 밝히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말을 걸고, 망집이라도 들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이방인이기에, 그러나 그처럼은 되지 않기 위해.
……대기 중이던 에이전트가, 면회 시간이 끝나간다고 알려왔다. 서펜트는 소라의 말을 쉽사리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불신보다는 경시에 가까운 냉소를 터트렸다. 그는 의자를 뒤로 밀어 일어서는 작은 아이에게 대고 말했다. 여전히 구속된 채로. 이물로 잔여된 채로.
"……충고 하나 드리죠. 키리타니 유고를 신용하지 마시길." 구태여 실장이 아닌 이름을 언급한 건 일종의 자조적 패러독스다. "그는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미련한 이상주의자니까요."
그가 뱉은 문장에 웃음기가 서렸는지, 혹은 지독히 서늘했는지 소라는 분간할 수 없었다. 모호한 안개가 그의 입가에 머물다, 항 레니게이드 성분에 까무룩 지워진 것만은 보았다. 굴절된 입꼬리가 슬프게 웃는 듯이 보였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기혐오.
소라는 잠시 '라이트닝 볼트'의 등을 떠올린다. 따라서 입매가 실룩거리는 기분이다. 너를 다시 찾을 수도 없게 된 이곳에서 나는,
*이젠…… 뭘 하면 돼……?*
*돌아가서 보고해야지, 같이.*
*응…… 일단, 같이 갈까요?*
그들이 부과해 준 존재의 의의, 히어로즈 크로스 취득과 멘토 지원 제도로 연장된 삶. 그 무게가 내려앉아 입술 선을 가지런히 맞춘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어. 살아가는 걸."
소라는 덤덤히 속삭이면서 몸을 돌렸다.
"나는 생존해 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이건 위로였다. "그러니까, 그걸로 괜찮아……."
"……."
"……또 올게."
소라는 바깥으로 나왔다. 도심의 빌딩이 비죽 솟은 수평선 사이로 태양이 점차 몸을 뉘고 있었다. 금빛 노을을 늘어선 빌딩 외벽이 일제히 반사하는 풍경은 일견 찬란했다. 범죄다발도시 도쿄, 화려하고 위험하며 매혹적인 기만의 도시. 예정된 일정은 모두 끝냈으므로 지원받은 주거지—아파트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비교적 한가했다. 소라는 가만히 거리의 인파 사이로 들어섰다. 곳곳에서 고층 빌딩 전광판에 히어로들의 영상이 지나갔다.
지난번 키리타니 실장과의 대화 이후로, 소라 또한 히어로 라이선스를 취득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R대책실과 멘토들의 도움으로 훈련받으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TV 속 히어로들처럼 화려한 이펙트를 민간인에게 무해한 정도로 조절하는 일은 다른 방향으로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만' 힘을 휘두른 소라에게는 적잖은 노력을 요하는 시도였다. 죽이기 위해 힘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지 않기 위해 힘을 컨트롤하는 것. FH에서의 버릇으로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훈련장에서 마주친 린에게 '소라쨩, 애먹고 있구나?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기합 들어간 격려를 받은 뒤로는 인내도 내려놓았다.
'빌런, 제압……. 졈도 은폐……. 어째서 힘, 조절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무미건조하게 불만을 내뱉자, 검을 갈무리한 타츠키가 부드럽게 웃었다.
'소라 씨가 되려는 건 히어로니까요.'
'히어로도 싸우는데……. 무언가, 다른가요……?'
'히어로는 파괴하기 위해 싸우지 않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쪽이죠.'
타츠키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덧붙였다. 하나비 씨도, 린 씨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저도요.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게 이해를 뜻하지는 않았다. 소라는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 지키려던 시도를 품어본 적 없었다. 그가 싸우는 이유는 단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내가 나로서 있을 자리'를 찾는 것뿐이었다. 히어로로서의 자각, 사유는 부재했다. 능동을 쥐어본 적 없는 꼭두각시 인형의 삶처럼.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진 걸까. 소라는 생각했다. 서펜트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온전히 그나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내방자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단지 이렇게 해야만, 이곳에 머물 자리가 생길 것 같았다. 숨을 쉬어도 되는 이유를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졈—내몰려진 이들이 은폐되지 않는 세계, 무고한 오버드들이 희생되지 않는 세계. 그걸 주장하기 위해서는 서펜트가 하지 못했던 일, 이 세계의 일원으로 녹아드는 일을 해내야 한다. 그저 '불려 왔을' 뿐인 이에게는 불합리한 요구다. 나는 사유하고 존재하는데도, 그것만으로 온당해지지 않고 끊임없이 내가 이 세계에 살아있어도 된다고, 머물러도 된다고 증명해야 한다니. 그러나 소라는 그러기로 결심한다. 나는, '우리'는 살아있을 것이라고 외치는 길을 걷기로 한다.
스스로 갈 방향을 정한 건 처음이었다. 문득 소라는 깨닫는다. 손에는 키리타니 실장이 쥐여준 안경이 나침반처럼 들려 있다. 소라는 다음 발을 내딛기 전에 멈추어 섰다. 안경집을 열어, 키리타니에게 받은 안경을 썼다. 시야 가장자리를 둘러싸듯 맺힌 안경테의 윤곽은 경계 같았다. 이 안경 너머로 펼쳐지는 세계와 소라 자신을 구분 짓는 선상이자 프레임. 소라는 그것이 노을 찬란한 이 도시에 떨어졌을 때부터, 그리고 아마도 돌아가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수반될 괴리감의 표상임을 직감한다. 이상하게도 깨달은 직후 이전만큼 고독하지 않았다. 아프거나 두렵지도 않았다. 그 구별이야말로 소라가 앞선 누군가의 가능성이 아닌, '소라'로서 존재한다는 증거였다.